[책마을] 美 보수주의는 어떻게 소련의 방해를 뚫고 일어섰나

입력 2023-07-14 18:47   수정 2023-07-15 00:53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휘태커 체임버스 전 타임지 북 리뷰 에디터에게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자유 메달을 추서했다. 레이건은 오늘날 자신을 있게 한 한 권의 책은 체임버스가 쓴 800쪽짜리 자서전 <증인(Witness)>이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로서 옛 소련 첩보기관 협력자였다가 전향한 체임버스의 ‘참회록’을 읽고 감명한 레이건은 평생 열혈 반공주의자 공화당원이 되고, 가장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 반열에까지 올랐다.

체임버스를 얘기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앨저 히스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국무부 고위 관료를 맡은 그는 철저한 소련 스파이였다. 그가 역사의 분수령에서 수행한 일들을 보면 아찔한 것이 많다.

루스벨트와 윈스턴 처칠, 스탈린이 만나 전후 세계 체제를 논의한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는 미·소가 38선을 기점으로 분할 통치하도록 해 남북 분단의 시발점이 됐다. 그때 미국 측 실무 담당자가 히스였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협상 복안을 미리 다 알고 협상장에 들어간 것이다. 히스는 유엔 체제를 구축할 때 임시 사무총장도 맡았다. 그를 가장 아낀 국무부 상관이 6·25 이전 한반도를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의 장본인 딘 애치슨이었다.

히스의 스파이 행각을 폭로한 사람이 바로 체임버스다. 히스는 위증죄(실상은 반역죄)로 4년여를 복역하고 나온 뒤 한동안 매카시즘의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미국 좌파의 아이콘 노릇까지 했으나, 결국 구소련의 비밀문서 해제 후 스파이였음이 명백히 입증됐다.

미국 역사학자 조지 내쉬의 <1945년 이후 미국 보수주의의 지적 운동>(회화나무)은 미국 보수 이념 운동을 다룬 교과서·통사급 책이다. 오랜만에 보는 784쪽짜리 벽돌 책이다. 책의 기점이 된 1945년 당시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암흑기였다. 지식인 집단은 좌익화했고, 보수주의는 인기 있는 용어가 아니었다. 친소련 루스벨트 행정부에는 소련 스파이가 득실거렸다.

저자는 체임버스의 <증인>을 20세기 가장 중요한 자서전의 하나로 평가했다. 체임버스의 <증인>과 히스 사건 이후 1955년 미국 최고의 보수 저널 ‘내셔널 리뷰’가 창간되면서 미국 보수주의 운동이 본격화했다.

전후 보수주의 운동의 선구자는 미국으로 건너온 오스트리아의 두 경제학자였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루트비히 폰 미제스다. 하이에크의 바이블 <노예의 길>은 처음 미국의 세 출판사에서 퇴짜맞은 뒤 시카고대에서 고작 2000부 인쇄로 시작했으나, ‘리더스다이제스트’ 북클럽을 통해 100만 부 이상 배포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 하이에크가 전국적 유명 강연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미국의 전후 자유주의 지적 운동은 행동하는 이념의 운동이었다”고 강조한다. 경제교육재단(FEE)을 결성해 전통의 회복과 자유주의 이념 보급을 촉진하는 전국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 미국 주도 아래 유럽 학자들이 가세해 ‘자유주의혁신국제연구센터’도 설립했다. 미국 보수주의 사상을 범세계적으로 확산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이 단체를 후일 다른 이름으로 불렀는데,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다.

이 책에는 미국은 물론 세계 보수주의 경전으로 삼을 저서들이 여러 대목에서 소개된다. 앞서 언급한 <노예의 길>, <증인>과 더불어 윌리엄 버클리의 <예일대에서의 신과 인간(God and Man at Yale)>, 리처드 위버의 <이념에는 결과가 따른다(Ideas Have Consequences)>,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The Conservative Mind)> 등이다. 이 중 국내에는 안타깝게도 <노예의 길>과 <보수의 정신> 정도만 번역돼 있다.

책은 지식인 운동 중심으로 전개돼 대중 정치 캠페인의 흐름에 대한 소개는 다소 빈약하다. 시대적으로 레이건 때까지만 다룬 것도 아쉽다.

저자는 지난한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보수주의자들의 끈기 있는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패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자신과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믿으며 보수주의를 미국의 주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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